일상2017. 12. 25. 11:11

코로나로 인해 데미안이 영업을 중단하였음을 공지합니다. T.T

 

얼마전 남춘천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첫 만남을 한 “데미안” 건물을 지을 때 부터 뭐가 들어설지 궁금했었던 그 곳에 서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


말보단 사진으로... 조용히 독서를 즐기며 차도 한잔하고 음악도 들으며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습니다.
건물은 옥산가에서 지은 건물로 1층은 서점과 옥판매장, 빵집 겸 카페를 통합 운영하고 있고. 2층은 서점, 음반, 카페가 3층은 서점과 카페(조금 더 고급)가 있습니다.

ㅇ1층 : 옥 악세사리 판매점, 서점, 그 빵집, 카페 데미안
ㅇ2층 : 서점, 음반, 카페 해세
ㅇ3층 : 서점, 고급카페 에밀

일본잡지부터 만화책 초등학생용 교과서 까지 다양하게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네요.

컴퓨터 및 it서적까지 다양하게 구분해 놓았는데 아직 책장이 가득 채워지지는 않았습니다.

1층에 있는 옥으로 가공한 제품들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가격이 ~ 후덜덜...  옥광산에서는 이런 제품을 원료로 사용되는 옥들이 일일 1천만원 이상되는 양이 나온다고 하니... 

아래사진은 1층 로비입니다.

오픈은 오전 10시 닫는 시간은 오후 9시 랍니다. 좀 더 늦게까지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각 층별로 카페의 이름이 다 다르네요. 여기는 2층입니다.


서점이라고 해서 그냥 일반 동네서점이 아니고 대형서점 답게 앉아서 독서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2층에서는 음반과 책들이 음악감상도 할 수 있고 하루 종일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시고....  춘천엔 이런 장소가 없었던 것이 정말 많이 아쉬웠었습니다. 이젠 주말이나 저녁시간에 갈 곳이 생겨 정말 좋고 아이들에게도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더 좋아지는 춘천의 모습을 보고 기분도 좋아지고 춘천에 정착하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데미안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

[Demian]

'나'를 찾아가는 길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와 같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Demian)』(1919)의 첫 구절의 철학적인 성찰은 작품에 있어 계속 이어진다. 이 작품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다.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한 추구의 과정이 성찰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하여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나'를 찾아가는 길은 기존 규범과 결별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에 접어들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균열을 인식한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그 세계는 나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맑음과 깨끗함이었다. ···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말도,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이야기와 스캔들이 있었다.

두 세계를 가르는 균열을 보며 싱클레어는 이제 낡게 느껴지는 규범들 - 아버지 집, 종교, 도덕 - 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며 새로이 점검한다. 거기서 얻는 인식은 그를 유년의 맑고 밝은 한 세계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게 한다. 이 과정은 괴롭지만, 진정한 자기 자신을 향하는 길에서는 결국 투쟁하여 벗어나야 할 세계이다.

인식 안에 있던 분리는 현실에서도 일어나면서,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된다. 싱클레어는 또래와의 대화에서 부추겨져 저지르지도 않은 도둑질을 떠벌린 탓으로, 불량한 친구 크로머에게 혹독하게 시달린다. 그런데 그 돌파구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은 유년의 첫 시련, 악마같이 괴롭히던 크로머를 신비로운 혜안의 힘으로 쫓아 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와 다른 또 하나의 유년의 세계를 상징하던 크로머는 더 이상 싱클레어의 내면에 개입하지 못한다. 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직접적인 도움은, 결국 싱클레어를 유년의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하면서, 다만 온전히 자신만의 길로 걸어가도록 이끈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여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한다. 명백해 보이는 것들조차 "달리 볼 수도 있다, 그 점에 비판을 가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비판적 인식의 첫걸음이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나아가 카인의 표식은 기존의 세계의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 성찰하고 구도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한다. 그 과정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서 홀로 지내던 학창 시절 싱클레어는 다시금 더욱 방황한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 내 자신 속에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는 세상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나름의 저항의 형식"은 오만하고 방탕한 생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의 오솔길들을 똑바로 걸으려고 했는데, 그 길들이 내게는 너무 미끄러웠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정신적 지주에 대한 동경이 극도로 고조되었을 무렵, 즉 그 동경을 비로소 의지로부터 강렬히 추구하던 때에 싱클레어는 책갈피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한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인성과 수성, 선과 악을 다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신 압락사스1) - 압락사스란 원래 그리스, 오리엔트의 영지주의에서 신의 비밀의 이름을 뜻했다. 이 작품에서는 새롭게 찾아져야 할 그 어떤 신성의, 미지의 신비로움으로 전용되고 있다 - 가 암호처럼 등장한다. 우연히 만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는 압락사스에 대해 여러 가르침을 주는데, 싱클레어가 그려내는 꿈의 영상, 문장에 그려진 그림, '먼' 연인 베아트리체, 구름의 모습 등에서 압락사스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의 종교적 열망, 즉 지극히 자기 자신의 길이 아닌 현실적인 제도를 향하던 열망은, 결국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와 결별하는 계기가 된다.

싱클레어 역시 꿈속에 나타나는 자신의 열망에 갈등한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향하는 구도와 무의식 속의 열망이 결합하면서, 하나의 온전한 이미지가 나타나고, 이어 그 이미지가 현실로 된 인물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된다. 싱클레어는 그녀를 연모하며, 또한 스스로의 길에 몰두하는 이들의 진정한 연대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목표에 도달하지만, 그러면서도 도달하지 못한다. 어머니이자 애인인 영원의 여성, 에바 부인 - 독일어 에바(Eva)는 영어의 이브이다 - 은 그를 끌면서도 동시에 물리친다. 에바 부인 가운데서 싱클레어의 구도와 열망이, 상징과 현실이 결합한다. 무엇보다도, 싱클레어의 눈에 그녀는 더 깊이 자기 자신 속에 이르려는 '자신의 내면의 상징'처럼 비친다.

그녀는 바다였고, 그 안으로 나는 흘러들고 있었다. 그녀는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 하나로 그녀에게 날아가는 도중이었는데, 우리는 서로 만났고 우리가 서로를 끌어당겼음을 느꼈다. 함께 머물렀고 희열에 차 영원히, 소리 울리는, 가까운 원을 서로 에워싸며 돌았다.

싱클레어가 자신을 찾아 걸어온 험한 길을 두고 에바 부인이 싱클레어에게 묻는다. "돌이켜 생각해 봐,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 아름답지는 않았나?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 자아로 향하는 구도의 과정의 길은 운명처럼 힘겹게 놓여져 있지만, 그녀는 그 길 자체의 아름다움을 묻는다. 자기 자신으로 이르는 끝없는 길에서, 길 자체가 의미로 드러난다.

이 책의 마지막은 불협화음이 울리는 듯 날카롭게, 환상적으로 묘사된다. 전쟁이 터진다. 뜨겁게 갈구하던 에바 부인이 아니라 뜨거운 총탄이 싱클레어를 맞추어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야전병원에서 싱클레어는 다시 한 번 데미안과 마주친다. 데미안의 입맞춤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도자들, 개혁자들의 동맹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맞춤이기도 하다.

데미안이 사라진 후 싱클레어는 말한다.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 거기서 나는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이렇듯 데미안과 '나'가 거의 하나로 합쳐지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오래 추구해 마지않았던 자아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이다.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데몬, 즉 신, 수호신, 지켜주는 강한 힘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Er)가 대문자로 쓰이면서 신격의 표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싱클레어라는 이름은 독일의 불우했던 천재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친구 이름으로, '친구'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그렇게 한 존재의 구도의 여정은, 진정한 자아에의 신적인 합일로 마무리된다.

작품이 쓰여진 시대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씌어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되었다. 그 마지막 부분에서 세계대전의 묘사는 하나의 낡은 세계가 깨어지고 나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그 폭력에 대한 비판이 엇갈려 있다. 하지만 헤세의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묘사 방식은, 전쟁에 대한 비판이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헤세는 전쟁 포로들을 돕는 일에 종사했다.

한편, 1차 세계대전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도자 싱클레어의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작품 전반적으로 그는 낭만주의 및 고대 신화세계와 연결될 수 있을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 때문에 주인공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현실과 실패한 결합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전반에 걸쳐 명료하지 못한 언어와 지나친 상징성이 비판받기도 한다. 예민한 시대의 문제가 과도한 상징 속에서 상실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이 치열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그리는 것 자체로, 헤세는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사람은 결국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스스로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누구나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면을 부각시킨다. 단 한 번뿐인 인간의 목숨이 총칼 앞에서 무더기로 소멸되는 전쟁의 충격 속에서 쓴 것을 생각할 때, 헤세가 전하는 이 전언에는 더더욱 절실함이 배어 있다.

한편 성장, 자기구현의 문제는 독일문학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빌둥스로만(Bildungsroman)2)은 하나의 장르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1차대전 이후, 사회가 극도의 불안정을 겪으며 변화하는 가운데 성장소설의 문법 역시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데미안』에서 주인공이 겪는 시대를 반영하는 극심한 방황과, 가치를 아예 종교와 신화나 혹은 다른 시대의 사상과 철학과 같은 먼 곳에서 빌려보고자 했던 추구, 그리고 진정한 의미는 지극히 스스로 안을 향하는 데에서 비롯하게 하려는 지향은 당시의 젊은이들의 뒤흔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데미안』은 출판 당시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 유명했던 헤르만 헤세는 이 작품 『데미안. 한 젊음의 이야기 (Demian. Die Geschichte einer Jugend)』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 작품성만으로 평가 받고 싶어서였다. 그 결과 에밀 싱클레어라는 유령 작가가 당시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의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헤세는 이 상을 사양했다. 그 사이 한, 눈 밝은 독문학자가 문체 분석을 통하여 『데미안』이 헤세의 작품이라고 밝혀내기도 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헤세는, 문제는 내면이며, 인간이 목표로 삼고 걸어가야 할 길은 내면의 길이라는 생각에 몰두했다. 그는 "세계의 개선까지도 인간이 내면의 길을 충실히 가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쓴 바 있다. 내면으로의 길이 개인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계대전은 유럽 문화가 붕괴되고 재창조를 이룰 현상으로 해석한다.

"유럽이 지쳐있다는 것, 유럽이 고향으로 돌아가 휴식하고, 개조되고, 다시 태어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서술한다. 유럽 사람들이 세계를 대립의 공간이 아니라 통합과 단일의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헤세의 생각은 이 소설의 주제인 주인공의 자기구현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헤세는 이 시대의 인간들은 자기 구현의 길을 걷기 이전에는 유럽적인 양극사상에 빠져서 한쪽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쪽을 부인하려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헤세의 선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지만, 더 높은 단계를 향해 부단히 노력할 때 비로소 완전한 존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니체적인 성찰은 헤세의 작품들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인간이 좀더 고양된 자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양극성을 극복하고 단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또한 서구적인 이원론의 지양, 또는 기독교와 시민사회의 도덕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는 면도 그러하다.

헤세는 즐겨 상징을 통해 내면세계의 변화를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세상의 단일성을 인식하는 데에는 물, 불, 음악과 그림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절망과 고통을 경험하지만 결국 거기서 벗어나 고양된 자아를 구현하고, 이 과정은 한결같이 정신세계에서 자연의 세계를 거쳐서 두 세계를 통합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데미안』에서 『유리알 유희』까지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의 공통점이다.

작가 헤세와 다른 작품들

헤세는 경건하고 인문학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마울브론 신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발트해 연안 에스틀란트의 의사가문 출신으로 남독일에서 선교출판사를 운영했고, 외조부는 여러 해 인도에서 선교사 활동을 한 인도학자이다. 일찍부터 정신성과 동양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그 자신도 1911년 인도 여행을 결행했지만, 수마트라 섬까지 갔고 인도에 닿지는 못했다.

그 대신 『동방순례』(1941)나 『싯다르타』(1922) 같은 작품을 남겼다. 『싯다르타』는 인도가 배경이지만, 『데미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자기 구현과정을 담고 있다. 열반의 경지까지 가는, 필생의 목적에 가까이 이르는 모습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부처의 한 이름이 작품 속에서는 싯다르타와 고타마라는 두 인물로 나누어져 있다. 유럽적인 이원론적 사고를 반영하면서, 동양적 일원론을 선명히 지향한 것이다.

『황야의 이리』(1927)는 예술가를 소재로 한 매우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리'처럼 시민적인 삶에서 동떨어져 있는 주인공 할러는 예술가이고, 그의 문제는 '시대의 병'으로 진단된다. 시민들은 중용의 사람들이다. "가능한 것을 희생하여 보전과 안정을 얻고, 법열대신 양심의 평안을, 향략대신 안주를, 자유대신 편안함을, 몸을 불태우는 불꽃대신 알맞게 따스한 빛을" 얻으려 하며 양처럼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반면 예술가는 이리처럼 시민세계에 대한 마지막 미련까지 잃고, 외로운 국외자로 남아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독을 견뎌내는 존재다. 지적 우월감으로 시민들을 멸시하지만 고향이 없는 인간이다. 동시에 이리라는 '이중성과 분열성' 때문에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황야의 이리가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살아가는 길은 유머에 있다. 할러가 걷는 자기 구현의 단계도 싯다르타의 그것과 흡사하다. 헤세의 작품 중에서 현실에 대한 관심을 비교적 많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에서는 수도원을 뛰쳐나와 방황하는 예술가적 인물 골드문트 - 그의 이름은 '황금 입'이라는 뜻이다 - 와 수도원장이 되는 지적인 인물 나르치스('나르시스')라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자기 구현과정이 이중창처럼 그려진다. 골드문트가 10년 동안 세속을 떠돌면서 예술가로 성숙되는 과정에 비중이 두어져 있다. 제목도 처음에는 '골드문트 혹은 죄악의 경배', '어머니에게로 가는 골드문트의 길', '골드문트와 나르치스' 등으로 골드문트가 중심에 놓여 있었다. 골드문트는 방황 끝에 수도원으로 돌아와 나르치스 곁에서 숨을 거둔다.

골드문트의 예술과 자기 구현의 마지막 종착지는 '어머니'이다. 작품의 뛰어난 자연 묘사는 삶과 죽음의 전환과 사랑의 무상함을 명암있게 드러낸다. 예술이야말로 무상성을 뛰어넘어 삶과 죽음 간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수단이란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노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1943)는 카스탈리엔이라는 이상향을 설정하여 미래를 보여주는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은 나치 집권 시기에 집필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헤세는 "공기는 온통 독에 차고, 삶은 또다시 불안한 것이 되었다. 내게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첫 번째는 세계의 모든 독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만드는 일이고, 두 번째는 야만적 폭력에 맞서는 정신의 항거를 표현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유리알 유희』의 무대인 카스탈리엔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교육주와 같이 이상적으로 설정된, 미래의 가상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소명받은 사람들이 하는 유리알 유희는 음악, 문학 등 예술적, 지적 능력의 총합이 발현되는 최고의 정신적 게임이다. 이곳에서 최고의 명인이 된 주인공 크네히트는 그러나 다시 이 곳을 떠나 현실로 돌아오며, 고산지대의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아침햇볕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 차가운 빛을 발하는 별, 고독과 차가운 아침 공기, 차가운 호수와 같은 자연 묘사 속에서 크네히트가 죽음을 통하여 들어가는 불멸의 세계가 시사된다. 크네히트3)의 삶은 정신세계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봉사로 이루어지며, 죽음을 통해 영원한 세계로 이어지며 카스탈리엔도 그를 통해 거듭나고 있다.

헤세는 단조로울 만큼 치열하게 자기 자신에 이르는 구도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착했다. 헤세가 이렇게 단조롭고 집요할 만큼 가열한 정신성을 추구한 것은, '정신성'이야말로 혼란하고 황폐하고 천박해져 버린 '잡문시대'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은 1,2차 세계대전과 그것들을 전후한 혼란을 겪으면서 더욱 굳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한 시대를 반영하던 한 주제에서 비롯한 그의 저서들은 이후로도 계속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데미안』은, 헤세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그러하듯이, 독일보다는 오히려 세계 각국에서, 특히 미국, 아시아권에서 활발하게 수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독일어권의 작품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헤세의 대 주제인 '자신에 이르는 길'이 그만큼 시대를 초월하는 관심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치열한 구도와 성장의 과정을 담은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느 곳에서든, 헤매이는 많은 이들에게 다시금 등불이 될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어떠한 길이었는가? 그 각각의 과정들은 싱클레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2.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 같은 조력자들은 싱클레어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존재들인가? 이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3. 『데미안』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쓰여졌다. 그 당시에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가졌겠는가? 그리고 『데미안』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활발하게 수용된 바 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네이버 지식백과] 데미안 [Demian] -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

 

 

Posted by 준비된 일상
여행2017. 12. 12. 10:53

불과 5년전만 해도 특별히 볼것도 없고 허름한 눈썰매장과 찜질방을 운영하던 곳이 였는데 이렇게 변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완전 기업형 타운으로 운영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볼거리도 많고 또 찾고 싶은 명소가 되어 버릿 것 같습니다.

옥산가 안내도 입니다. 본사를 비롯한 전시판매장, 찜질방, 옥산가 식당, 미술관, 그리고 여기엔 나오진 않는데 우측 상단에 그빵집이 새로 생겼습니다.

가는 길은 그냥 시골 골짜기로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느낌은 그대로 입니다. 도착해 보면 미술관과 박물관이 눈에 들어옵니다. "달아실"

미술관은 관람료가 1만원 입니다. 좀 비싸긴 하지만 들어가보면 한번은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많은 노력이 돋보입니다.

지용호 작가의 lion-8 입니다. 미술관 앞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추구하는 육식변이 시리즈중 한 작품으로 초원의 왕자 사자입니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골격을 만든다음 폐타이어를 이용해서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창작된 작품입니다.

다양한 볼거리와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임에 분명합니다.

산양부터 미어캣 각종 다양한 동물들과 전시물들이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어릴적 생각나게 하는 전격 Z작전 "키트" 꿈의 자동차 였죠! 

박물관안에 들어가면 더욱더 동심을 자극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아이언맨을 비롯한

각종 캐릭터들의 피큐어와 모형들 잠시나마 어린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박물관 뒷편으로 올라가시면 산책코스를 만들어 놨습니다. 옥산가 답게 옥으로 만들어진 불상도 있는데요. 중국에서 기증받은 불상입니다. 거대한 옥으로 10여년에 걸쳐 작업하여 만든 장인정신이 깃든 작품입니다.

예전에 없었던 산책 길까지 거닐다 보니 정말 마음이 다 경건해 지는 느낌입니다. 

이제 찜질방으로 가볼까요? 우선 중요한 가격입니다. 대인은 12000원 소인은 반값입니다.

찜질방은 맘껏 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긴 시간을 느끼는 것이 좋은데.... 

시간이 별로 없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가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옥동굴 체험장은 대인 5000원, 소인 4000원입니다. 한번은 가볼만 한 것 같습니다.

들어 가시면 방문기념으로 옥산가 물을 줍니다. 정말 시원한게 맛있습니다.

찜질복을 대여해야 합니다. 입장료에 같이 포함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판초는 특별히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내부에 모습은 옥돌들로 가득합니다. 깔끔하니 정렬된 기분, 옥돌들 사이에 누워서 옥의 기운을 느끼며 흘리는 땀은 정말이지 피부에 많은 변화가 생기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이가신 분들은 정말 피부가 좋아 졌다고 하시네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은 1층 로비입니다. 여긴 각종 옥으로 만든 기념품들이 즐비합니다. 특별히 필요한 건 없었는데 옥비누하나 구매해 봤습니다.

옥동굴 체험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대반 신기함 반으로 들어가 봤는데 여느 탄광 동굴에 들어가는 느낌이였지만 상당히 안전해 보였고, 관광을 위해 제반 안전시설을 잘 해 놓아 좋았습니다. 중간중간 쉼터 비슷한 약수터(옥정수 시음터)와 의자들 맘에 들었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 깨끗하고 신기한 땅 속 세계의 연옥광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찜질도하고 옥동굴도 체험하고 나니 배가 고프네요. 

그림같은 빵집도 옥산가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빵집 하나였는데 지금은 길건너에 그빵집 2개 새로 생겼습니다. 

빵의 맛은 아주 좋습니다. 가격은 그리 착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구봉산 빵공장 보다는 저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빵 맛은 그림같은 빵집이 더 맛 있습니다. 제 주관적인 생각이라서... 참고만 해주세요. 

트랜스 포머가 2층을 지키고 있습니다. ㅋㅋㅋ

1층에서 빵을 골라 계산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카페가 있습니다. 카페어서 빵과 커피를 마시며 옥산가아래를 내려다 보며 풍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옥산가에 열기구가 있습니다. 스카이 레져에서 운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타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소개는 올리겠습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 계류비행
  • 운영장소 : 춘천옥산가 주차장
  • 운영시간 : 주중 오후 5시~7시(당일 기상 상황에 따라 운영, 방문 전 반드시 전화 확인 바랍니다.)
● 자유비행
  • 운영장소 : 북한강변 일원
  • 운영시간 : 일출 시간대 탑승, 비행 시간 40분~1시간 이내

 

정말 오랜만에 찾은 옥광산이였습니다. 아! 이젠 옥산가라고 불러야하는게 맞죠... 예전엔 그냥 옥광산이였는데.... 지금은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상품, 관람상품을 가진 기업형 문화센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절별로 찾는 즐거움도 있을 것 같고, 가끔 빵과 맛있는 커피가 생각날 때 발길을 돌릴만한 곳으로 기억하려고 합니다.

춘천 여행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꼭 한번 고려해 보세요. 자가용이 없어도 이용가능합니다. 춘천역에서 운행하는 차량이 있습니다. 


전철 시간표에 맞게 운행하는 차량이 있고 콜택시도 있군요! ^^

참고하시고 즐거운 여행 되시길 기원합니다. ^^

Posted by 준비된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