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8. 8. 1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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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준비된 일상
일상2018. 1. 6. 00:15

왕조 조선의 설계자
鄭道傳

출생 - 사망 1342 ~ 1398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1 백성의 삶 속에서 다져진 민본사상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
<출처 : Steve46814 at ko.wikipedia.com>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2 천명을 읽고 장자방을 자처하다
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3 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후일의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정도전은 경복궁 및 도성의 자리를 정하는 새 왕조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출처 : Joon-Young, Kim at ko.wikipedia.com>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4 요동 정벌 주장과 표전문 사건


[경국대전]의 기반이 된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작성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표방하였다. 다만, 여진과 제휴한다든지, 요동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요동 진출 문제와 관련해서 정도전은 명나라에서 보면 요주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 : 중화질서 속에서 중국 이외의 민족을 지칭하는 개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이 되었던 사례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이었다.

급기야 1394년(태조 3년)에 이른바 ‘표전문사건’이 일어났다. 표전문이란 표문과 전문의 합칭으로, 조선이 중국의 황제와 황태자에게 보내는 공식 문서를 말한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을 문제 삼았다.

유구 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문제가 된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의 요구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였다.

논의 결과 표문을 작성한 사람은 정총이고,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김약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사지로 정도전을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총은 병을 이유로 가지 않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요구가 거세었지만, 정도전이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시 정치를 주도하던 조정 관리들이 대부분 정도전 계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후일의 태종 계열인 하륜만이 정도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김약항이 파견되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 명나라에서 다시 정도전을 압송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 훈련을 강화하며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5 이상과 현실의 갈등,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 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Posted by 준비된 일상
카테고리 없음2018. 1. 5. 23:49

춘천에 살며 어떤 대학들이 있는지 몰랐다!! 아니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강원도의 국립대학인 강원대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소양을 배우는 "춘천교육대학교", 한림성심대학교 등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강원대학교

[Kangwon National University, ]

요약   강원지역을 대표하는 국립 종합대학교로 춘천과 삼척에 캠퍼스가 있다.
강원대학교
유형 국립 종합대학
교훈 실사구시
교화 철쭉
교목 잣나무
마스코트 곰두리
학생수 2만 6,285명 (본교 1만 9,277명, 삼척캠퍼스 7,008명)(2014년)
전임교원수 979명 (본교 782명, 삼척캠퍼스 197명)(2014년)

1947년 설립된 도립 춘천농업대학에서 출발했다. 당시 농학과를 설치하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다. 1951년 춘천농과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임학과와 축산학과를 신설했다. 1953년 국립 대학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학과를 늘리고 다양한 연구소를 설치했다. 1970년 강원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1979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강원대학교가 되었다.

강원대학교는 1997년 의과대학을 신설하고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을 늘렸다. 2004년 특수법인으로 산학협력단을 신설했다. 2006년 삼척대학교를 통합해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가 출범했다.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의 모체는 삼척대학교다. 삼척대학교는 1939년 삼척공립직업학교(3년제)로 설립인가를 받고 광산과, 토목과 2개 학과를 설치해 출발하였다.

1950년 삼척공업고등학교로, 1963년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로, 1979년 삼척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을 거듭하였다. 1991년 4년제 삼척산업대학으로, 1993년 삼척산업대학교로, 1998년 삼척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2006년 3월 1일 국립 강원대학교와 통합되었으며 같은 해 3월 2일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로 출범하였다. 2009년 3월 삼척 제2캠퍼스인 도계캠퍼스의 문을 열었다. 2010년 1월 삼척 제2(도계)캠퍼스 11개 동을 준공했다.

2014년 기준 춘천캠퍼스는 16개 단과대학, 1개 학부, 8개 대학원 및 2개 전문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에는 경영대학, 공과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동물생명과학대학, 문화예술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사회과학대학, 산림환경과학대학, 수의과대학, 약학대학, 의과대학, 의생명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IT대학, 스포츠과학부가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등 2개의 전문대학원이 있다.

부속시설로 공자학원, 농업생명과학대학 부속농장, 백령아트센터, 평생교육원, 국제어학원, 과학영재교육원, 공학교육혁신센터, 창업보육센터 등 40개가 있으며, 부설연구소로 동물의학종합연구소, 분자과학융합기술연구소, 유라시아연구소, 지구자원연구소, 한국동굴연구소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39개 연구소가 있다. 특성화대학으로 동물산업 분야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동물생명과학대학, 국내 유일의 산림 분야 단과대학인 산림환경과학대학이 있다. 춘천캠퍼스는 해외 39개국 140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과 교수교환, 공동연구, 학술자료, 정보교환, 행정직원 교류, 학술회의 개최 등 활발한 교류활동을 하고 있다.

삼척캠퍼스는 공학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디자인스포츠대학, 보건과학대학 등 4개 단과대학, 일반대학원, 방재전문대학원, 산업과학대학원 등 3개 대학원이 설치돼 있다. 보건과학대학은 도계캠퍼스에 있다.

부속시설로 삼척국제어학원, 삼척생활관, 도계생활관, 삼척공학교육혁신센터가 있고, 부속연구소로 강원지역문화특화디자인혁신센터, 국제유기농림수산센터, 국토문제연구소, 전통문화연구소 등 17개 연구소가 있다.

삼척캠퍼스는 해외 15개국 34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어학연수, 복수학위 취득,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관련사이트  http://www.kangwon.ac.kr

강원대학교 정문

강원대학교 정문강원도 춘천시 효자동
촬영일: 2010. 10. 25.

원본보기

출처: 네이버 지도

 

[네이버 지식백과]강원대학교 [Kangwon National University, 江原大學校]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학교, 굿모닝미디어)

 

 

두산백과

한림대학교

[Hallym University, ]

요약   강원도 춘천시 옥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
한림대학교 본부
구분 사립
특성 종합대학
개교일 1982년 5월 15일
교훈 사랑, 진실, 자율
상징동물 봉황
면적(㎡) 259,129
홈페이지 www.hallym.ac.kr
소재지 강원 춘천시 한림대학길 1(옥천동 1), 서울 강남구 대치동 907-13(서울센터) 지도

1982년 윤덕선이 학교법인 일송()학원에서 한림대학으로 설립하여 초대학장에 김탁일()이 취임하였으며, 1989년 종합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99년 동북아지역연구학과의 명칭을 지역연구학과로 바꾸었고, 2001년 언어청각학부를 신설하였으며 수학통계학부의 명칭을 수리정보과학부로 바꾸었다. 교훈은 사랑, 진실, 자율이다.

한림원의 전통을 계승하고 학문의 비약적 발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학의 연구기능에 중점을 두며, 국제사회와의 활발한 교류에 대응하여 어학교육에 치중하고, 1인 1기 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2011년 기준 일반대학원·경영대학원·사회복지대학원·보건대학원·임상치의학대학원·간호대학원 6개 대학원, 인문대학·사회과학대학·경영대학·자연과학대학·정보전자 공과대학·의과대학·기초교육대학 7개 단과대학과 국제학부 등 7개 학부, 22개 학과, 7개 전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설연구기관으로 러시아연구소·비교문학연구소·생사학연구소 등 57개. 산학협력기관으로 기술개발센터·창업보육센터 등 4개 센터가 있다.

일본, 미국, 중국, 대만, 몽골, 영국, 핀란드, 스페인, 터키, 페루, 헝가리 등 39개국의 171개 대학과 교류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참조항목

한림대학교

한림대학교강원도 춘천시 옥천동. 1982년 개교.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한림대학교 [Hallym University, 翰林大學校] (두산백과)

 

 

 

춘천교육대학교

[Chuncheon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

요약 강원도 춘천에 있는 국립 교육대학.
춘천교육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개교시기 1939년 4월 1일
유형 국립 교육대학
교훈 (학행일치)
교화 목련
교목 은행나무
학생수 2,248명(2014년)
전임교원수 73명(2014년)

춘천교육대학교는 강원지역의 초등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춘천시에 설립된 국립대학교다. 1939년 춘천사범학교로 개교하여, 1962년 2년제 교육대학으로, 1983년 4년제 정규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지금의 춘천교육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93년이다. 1996년 교육대학원이 설립되었다. 2006년 5월 춘천교육대학교 대학발전기금(법인)을 설립했다. 2009년 5월 교육대학 실용영어 강화 지원사업 최우수대학에 선정되었다. 같은해 10월 영어 도서관(English Resource World)을 개관했다.

대학 학부과정은 윤리교육과, 국어교육과, 사회과교육과, 교육학과, 수학교육과, 과학교육과, 실과교육과, 음악교육과, 미술교육과, 체육교육과, 영어교육과, 컴퓨터교육과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대학원은 초등학교 교과교육 관련 전공 외에도 다문화윤리교육, 교육방법, 교육행정, 글로벌·통일교육, 초등상담심리, 특수교육, 아동문학교육, 영재교육, 국악교육, 초등무용교육, 유아교육, 조형예술창작, 스포츠지도 전공 등 모두 24개 전공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매년 학부 모집인원은 신입생 350여 명, 대학원은 24개 석사과정에 180여 명이다. 매년 이 대학의 신입생 출신지역을 보면 강원도가 약 23%, 경기도와 서울이 약 56%, 경북이 약 6%, 기타 15%이다. 그동안 배출된 졸업생은 2014년 기준으로 약 2만 3,000여 명이다. 부설초등학교는 춘천시 효자동에 있다.

부설기관으로 교육연수원과 평생교육원, 부속시설로 정보전산원, 생활관, 초등교육연구원, 교수학습개발원 등이 있다. 초등교육연구원 산하에 과학교육연구소, 인문사회교육연구소, 어린이철학교육연구소, 한국음악교육연구소, 아동문학교육연구소, 문화예술교육연구소 등 18개 기관이 있다. 기숙사는 388실을 갖추고 771명을 수용한다.

미국 제네바대학, 일본 돗토리대학, 중국 절강사범대학 등 해외 10개국 19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어학연수, 해외봉사활동, 문화체험연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련사이트  http://www.cnue.ac.kr

관련이미지
춘천교육대학교 정문

춘천교육대학교 정문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촬영일: 2010. 10. 22.
출처: 네이버 지도원본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춘천교육대학교 [Chuncheon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春川敎育大學校]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학교, 굿모닝미디어)

 

그 외에도 한림성심대학, 폴리텍대학, 방송통신대학이 있는데 이 대학들은 다음 포스팅에서 기록하겠습니다. ^^

Posted by 준비된 일상